20인의 기록

박병오

박병오
언양매일대장간 / 박병오 / 052-264-0666

60년 외길 인생 쇠는 나의 운명

아버지의 손을 잡고 대장간 문을 들어선 것이 60년도 더 지난 일이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절 집안이 어려워 어린 나이에도 생활전선에 뛰어들던 것이 나뿐만은 아니었다.
그때 나이가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해 열두 살 되던 해였는데 부모님은 대장간 일을 배우면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다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지금은 모든 것이 기계화되어 편리해졌지만 그때는 모든 작업을 인력으로 해야 했던 시절이라 농부들에게 대장간은 없어서는 안 될 곳이었다.
머슴살이를 하러 들어간 친구들은 일 년에 쌀 몇 가마를 받는 조건으로 일했고 숙식을 제공받았다. 대장간은 출퇴근이 있는 반면에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기술을 배운다는 명목으로 무임금으로 일을 해야 했다.
어린 나이였기에 내가 주로 맡은 일은 대장간 선배들의 다양한 허드렛일과 풀무질이었지만(대장간에서 쇠를 달구거나 또는 녹이기 위하여 화덕에 뜨거운 공기를 불어넣는 기구), 어린아이의 팔 힘이 세면 얼마나 셌겠는가!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근육이 붙기 시작한 열여섯 살이 되었을 무렵부터 기술을 배우기 위해 선배들이 하는 일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모두가 퇴근한 이후부터 나의 일이 시작되었다. 눈으로 봐둔 과정을 혼자 터득하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열처리 과정이었다. 대장간은 7명이 1조로 움직였다. 풀무가 끝나면 대, 중, 소의 세 가지 함마 과정을 끝내고 제품을 만드는 기술 작업에 들어간다. 먼저 쇠를 쳐서 평평하게 만드는 일이다. 칼, 작두, 호미, 낫 모두 만들어지는 과정들이 달랐다. 가장 놀랐던 것은 부딪히는 쇳소리가 귀를 찌르듯 날카로우니, 쇠를 때리는 소리로 각 기능공들에게 신호를 준다는 사실이다. 다양한 망치음으로 서로에게 신호를 보낸다.

박병오

‘또그랑 땅땅. 또그랑 땡.’

사고란 늘 순간적이다. 대장간의 모든 일이 불을 가지고 하는 일이라 화상을 입는 사고가 많다.
어릴 때 다쳤던 화상 자국은 아직도 짙게 남아 있다. 칼날을 가는 과정에서 손을 베이는 일도 많다. 수없이 다치고 화상을 입다 보면 사고 날 순간을 직감으로 느끼게도 된다.

17살이 되던 해에는 주민등록증을 발급하러 오라는 통보를 받고 동사무소를 찾아갔지만 결국 열두 번도 더 방문을 해야 했다. 칼날에 베이고 불에 데었던 수많은 상처 탓에 지문이 선명하게 찍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하다가 점심시간에 짬을 내어 다녀오는데 그것도 여간 눈치 보이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동장에게 “지금은 내가 도둑질할 여력도 없고 나오지도 않는 지문을 찍으러 매번 방문하는 것도 힘들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동장의 배려로 내 첫 번째 주민등록증은 지문이 찍히지 않은 채로 발급됐다. 웃지 못 할 에피소드이다.

대장 장인으로 오랫동안 일을 해온 탓인지 자영업을 하고 있는 지금까지 일 년에 사흘 이상 쉬어 본 적이 없다.
세상이 달라지고 편해졌지만, 대장장이인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 내가 그 자리에 없다면 그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 아닌가

글ㆍ사진 이동근 작가

김귀자

김귀자
원조언양옛날곰탕 / 김귀자 / 010-4170-5752

문을 열고 들어간 가게 안. 테이블에는 삼삼오오 둘러앉아 뜨거운 국물을 ‘호~호~’ 불어가며 국물을 들이키는 손님들과 추운 날씨에도 줄을 서서 기다리는 손님들. 옛날곰탕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아빠 엄마 손을 잡고 시장 구경을 나온 아이들부터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이 허기를 채우고 가는 식당. 오랜 시간 우려낸 곰탕의 국물과 그릇이 넘칠 만큼 가득 담은 육질 좋은 고기. 누구나 원조라는 간판을 달고 장사를 할 수는 있지만 시간과 노하우가 만들어낸 전통의 맛은 쉽게 흉내 내지 못한다. 원조언양옛날곰탕은 60년이라는 역사 속에서 상인들과 손님들의 발길을 멈춰 세우는 곳이다.

“언양곰탕의 시초는 식육점을 운영하시던 시어머니께서 장날이 되면 새벽부터 국물을 우려내 곰탕을 끓여 배고픈 상인과 손님들에게 대접하던 것이었어요.
2, 7 장날에만 장사를 하다가 가게를 하나 얻어서 본격적으로 식당을 운영하기 시작하셨죠. 제가 가게를 이어받은 지 20년이 더해져 6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남편은 8남매 중에 막내였고 직장생활을 하던 때였는데 어느 날 어머님께서 저희를 부르셨어요. 곰탕집을 이어갈 생각이 없는지 진지하게 물으셨죠. 어머님께서 힘들게 가게를 운영하고 계시다는 걸 눈으로 보아 알고 있었고 선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일이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죠.

김귀자 그래도 한번 마음먹은 것은 해내고야 마는 성격이기도 하고 어머님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이 들었어요. 잘 할 수 있을 것이란 마음으로 어머님께 하나둘 배워가는 동안 사실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들도 있었어요. 어머님이 알려 주시는 대로 재료도 쓰고 사골을 우려내는 데에도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니 제 머릿속은 맛에 대한 생각으로 온통 가득 차 있었어요. 하지만 도무지 어머님의 손맛이 나질 않는 거예요. 정말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들었어요. 곰탕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직업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김귀자 사장이 기억하는 시어머님의 모습은 오로지 일밖에 모르셨던 분이다. 치열한 시대를 거침없이 살아온 여장부의 모습으로 8남매의 뒷바라지를 위해 주저할 틈 없이 부지런해야만 했던 터다. 치열하게 산업화시대를 살아낸 모든 아버지 어머니들의 초상이기도 하다. 자신도 자식을 낳아 살아가면서 같은 여자로서, 음식을 만드는 책임자로서 얼마나 힘드셨을지 비로소 어머님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원조옛날곰탕은 지난 시절을 추억하는 이들에게 본연의 깊은 맛을 전하면서 어머님이 쌓아 온 곰탕에 대한 자부심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어둠이 짙게 찾아온 저녁 여덟 시가 되면 가게의 문은 닫히지만 김귀자 사장의 하루 일과는 끝이 아니다. 문이 닫힌 그 시간부터 다음날 손님들에게 내줄 사골 국물을 우려내고 재료 준비까지 마치고 나면 새벽 1시다. 드나드는 손님만 없을 뿐 그 시간이 되도록 가게의 불은 늘 환하게 켜져 있다. 그제야 비로소 긴 하루가 끝난다.

70년대 경부고속도로가 만들어질 당시 수많은 인부들이 이곳의 밥심으로 공사를 진행했다. 그때 할매곰탕을 맛보았던 인부들과 손님들이 추억과 맛을 쫓아 이곳을 다시 찾는다. 맛을 찾고 추억을 되새기는 이런 손님들이 있는 한 곰탕집은 늘 그 자리에서 따뜻한 국물을 내어줄 것이다.

글ㆍ사진 이동근 작가

한진숙

한진숙
천연염색한멋 / 한진숙 / 010-5145-5181

공무원에서 상인으로 변신하다.

나의 고향은 언양이다. 오랫동안 우체국의 공무원으로 일을 해오다가 아이들을 돌보는 문제로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다 98년도에 IMF라는 힘든 시기가 우리 가족에게도 닥쳤다. 아이들은 어느새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고, 모두가 부러워했던 전문직이라는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나니 특별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개인사무실의 경리와 책 외판원 일도 해 보았지만 내성적인 성격으로 영업직은 어려움이 많았다.

지금은 제2의 인생길에서 신나고 즐거운 삶을 살고 있다. 지금까지 해 오던 일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에 하루하루 적응해 나갈 시간도 빠듯했던 그 무렵 우연히 천연 염색을 만나게 된 것이 두 번째 인생이 열리는 시점이었다.
하얗고 깨끗한 천에 손수 천연 염색을 하여 세상에 단 한 벌뿐인 옷을 만들어 입는 일은 누구에게나 로망일 것이다. 그러나 맞춤옷의 가격은 매우 비싸다. 모든 작업을 수작업으로 하다 보니 선뜻 사 입기에는 그 가격이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내가 손수 옷까지 만들 수 있으면 그 가격을 조금은 낮출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여러 곳을 수소문하던 중 울산 동구에 위치한 서부여성사회복지관에서 한복반 수업을 개강한다고 하여 찾아가게 되었다. 동구 사람들을 위한 수업이지만 꼭 배우고 싶어 했던 나의 마음을 알아준 관계자의 배려로 특별히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 있던 수업을 듣기 위해 버스로 왕복 4시간 정도를 오가며 열심히 배우러 다녔다. 그 당시 내 나이 마흔다섯이었다.

처음 미싱을 배우며 연습했던 때가 기억난다. 운전 초보 시절만큼이나 미싱도 어렵게 느껴졌다. 나이 탓인지, 너무 늦게 시작한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었다. 목표를 갖고 시작했지만 걱정이 많고 생각했던 것처럼 빨리 실력이 늘지 않는 것도 나를 초조하게 했다.

박병오

내가 잘 할 수 있을 것 같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았으니 해보려면 제대로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남편과 상의를 했다. 더 나이가 들어서도 옷을 만들며 노후를 즐기듯 살고 싶다는 나의 뜻을 전했다. 내 의지를 이해해준 남편의 도움으로 아파트에서 거주해 오던 우리 가족은 옷을 만들고 염색을 할 수도 있는 마당이 있는 주택으로 이사했고 창고를 고쳐서 작업실로 만들었다.

수업이 없는 날이면 하얀색 천에 내가 좋아하는 색으로 염색하여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일도 하게 되었다. 여성회관, 복지관, 노동부 등에서 있는 수업들은 발품을 팔아 열심히 배우러 다녔다.
또 우연히 언양전통시장에 빈 가게가 있다고 하여 입점을 마음먹게 되었다. 장사라고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때라 겁도 나고 장사가 안 되면 어쩌나 걱정도 되었지만, 그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익히고 배운 자부심을 가지고 부딪쳐 보기로 마음먹었다.

나의 재능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지금은 옷 만드는 일뿐이다. 맞춤옷은 나에게 한 벌의 옷이 아니라 희망이자 꿈이다.
의뢰받은 옷의 치수를 재는 것부터 시작하여 미싱과 염색 등 다양한 과정을 통해 완성된 한 벌의 옷이 손님에게 전해져 흡족해 하는 표정을 보거나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비로소 한 벌의 옷은 완성된다. 그리고 이루고 싶은 일이 있다. 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요즘 연령에 상관없이 일을 할 수 있는 소규모 창업 시스템을 만들고 싶다. 시장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교육받을 수 있고, 교육을 통해 인적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그 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내가 제2의 인생을 찾은 것처럼.

글ㆍ사진 이동근 작가

박말식

박말식
신흥양품 / 박말식 / 010-5047-0482

울산 강동이 고향인 나는 언니의 중매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나에게도 청춘이라는 것이 있었을 무렵에는 ‘미싱’과 ‘자동차부품’ 업종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남편은 현재 소를 키우며 농사일도 하고 있는데 마을의 이장까지 겸하고 있다. 나 역시 활동적인 성격이기도 했기에 첫 아이를 출산한 뒤에는 사회생활을 계속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남편과 상의를 했는데 남편은 흔쾌히 내 뜻을 지지해주었다. 점포를 구하러 아이를 등에 업고 언양전통시장으로 발걸음 했던 것이 이렇게 지금에 이르렀다.
주부로 사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지만, 남편과 시어머님이 내 뜻을 배려해주지 않았더라면 32년째 운영하고 있는 이 양품점은 없었을 일이다. 당시에는 작은 점포로 시작했지만 장사를 하는 재미는 쏠쏠했다. 시어머님께서 아이를 자주 돌봐주시고, 내가 물건을 정리하는 동안 이웃한 가게인 ‘목화이불’이나 근처 상인들이 아이를 돌봐주시기도 했다. 부산진시장에 물건을 떼러 가는 날이면 요즘에야 시장버스를 이용해서 물건을 운반하는 것이 가능해졌지만, 옛날에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둘째 아이는 등에 업고 물건 가방은 어깨에 짊어진 채 시내버스를 타고 물건을 떼러 오갔다. 아이 기저귀를 갈아주려고 눕히면 등에 오래 업혀 있었던 탓에 양쪽 허벅지가 시뻘겋게 변해 있어서 가슴 아팠던 게 아직도 생생하다.

박말식

장사를 하며, 세 명의 아들을 모두 언양시장에서 키웠다. 장사를 하는 것도 말처럼 쉽지 않았는데 아이들을 키우는 것까지 어떻게 세월 지났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가게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아이들도 무탈하게 잘 성장해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누군가에게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나눔을 행하는 봉사활동으로 1998년 1월에 적십자협회에 입회해 지금까지 꾸준히 활동을 하고 있다. 어르신들을 방문하여 쌀도 나눠드리고 하는데, 그분들이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받는 것보다 아무 대가 없이 베풀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기쁘게 했다. 오랜 활동을 하며 협회의 총무 일을 8년간 도맡아했고, 회장을 맡아달라는 봉사자들의 추천과 남편의 지지, 그리고 가족들의 배려는 늘 고맙고 감사한 배려였다.

봉사 활동은 현재 20명 정도 되는 분들이 꾸준히 해오고 있다. 다문화 가정과도 결연을 맺고, 조손가정을 위한 밑반찬 봉사까지 해오다 보니 다양한 표창, 여성가족부 장관상까지 받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삶을 살면서 돈을 많이 번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 모두 대학교까지 보내고 가끔 용돈을 줄 수 있는 엄마가 된 것만으로도 매우 감사한 일이다. 때때로 장사를 하면서도 생각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늘 가게에 얽매여야 하는 상인의 입장에서 마음의 여유를 가진다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문제는 아니지만, 여유라는 것은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나는 가족의 지지와 상인들의 배려로 장사를 하면서 꾸준히 봉사활동도 해올 수 있었다. 이런 것도 스스로 마음먹고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부분이다. 언양시장의 상인들도 너무 가게에 얽매여 스트레스 받아가며 장사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번쯤은 내 삶도 돌아볼 수 있는 그런 여유도 만들어가며 자신의 본분에 충실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모두가 이웃이지 않은가!

글ㆍ사진 이동근 작가

채희순

박병오
엄마손반찬 / 채희순 / 010-9512-9000

<엄마손반찬>의 대표엄마 희순씨는 음식으로 꿈을 꾸는 사람이다. 부산에 살면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슬하에 두 딸과 아들을 두었다.
결혼하고부터 부산에서 식당을 해오다 막내아들이 말문을 틀 무렵 남편 직장을 따라 언양으로 이사를 왔다.

그것이 벌써 32년 전이다. 언양에서는 무얼 할까 고민을 해오다 눈에 띈 것이 이 반찬 가게 자리였다고 한다. IMF로 경기가 어렵지만 사람들이 밥은 먹고 살아야 하니 반찬은 팔릴 것이라고 생각했단다. 희순씨는 그렇게 반찬 가게를 시작했다.
전통요리를 제대로 해보고 싶어서 복지회관에서 한식 고급반까지 5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배워 요리대회에서 대상을 받았고 그 경험을 살려 최고의 정성이 담긴 반찬을 만들었다. 처음엔 재첩국, 젓갈, 김치 세 가지의 메뉴를 해오다 점점 메뉴를 늘려 갔다. 메뉴는 많지 않았지만 맛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엄마손반찬>을 찾았다. 희순씨의 장사 노하우는 꾸준함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가족과 함께 먹는 음식을 한다는 마음으로 만든 것이 꾸준하게 ‘내 단골’을 만든 계기라고 생각해요. 물론 모든 음식이 열이면 열 모든 사람의 입을 충족할 수는 없지만 어떤 쓴소리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니 입에 안 맞다 하면 또 다른 메뉴를 개발해 보려고 해요. 몇 년 전만 해도 아침부터 2,30명씩 와서 식당에 쓸 반찬을 많이 구매해갔어요. 요즘은 경기가 좋지 않아서 예전보다는 수요가 줄었지만 그때는 아침부터 너무 바빠서 정신이 없었어요. 다른 반찬집은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들어 파는 것을 쓰지만, 우리 집은 소량으로 정성껏 만드니 우리 집 반찬을 사다 식당 밑반찬으로 쓰면 사 온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으니 말이지요.”

엄마손반찬에서 만든 음식에는 화학조미료가 없다. 모든 음식들을 전통 방식으로 만든다. 주변의 많은 반찬 가게들이 세월 속에서 흥망성쇠를 거듭할 때에도 16년째 자리를 지켜올 수 있었던 데에는 희순씨의 단호함과 억척스러움도 한 몫 했다.
“시장에서 자리 잡기까지 순탄하지 않았어요. 말도 잘 못하지. 주변에서 반찬 가게가 생기면 나는 내 자리 지키려 밥 먹으러 어디 가지도 않고 생존 경쟁을 했어요. 휴일도 반납하고 가게를 열었죠. 그때는 힘들거나 지치지도 않았어요. 혼자만 잘 먹고 잘 살아보려 남한테 해코지 한 적도 없고요.”

인터넷 쇼핑몰이 떠오를 무렵 희순씨는 딸의 도움을 받아 <반찬몰>이라는 쇼핑 사이트를 운영했고, 전국적으로 반응이 좋았다. 지금은 딸이 시집을 가고 나니 인터넷 사업 운영이 더 이상 어려워 사이트를 닫았지만, 딸의 도움으로 벌게 된 돈으로 집도 샀다. 지금은 7명의 직원과 함께 하면서 희순씨는 언양전통시장 내에서 ‘반찬 가게로 성공한 아줌마’로 회자된다. 이제는 만드는 반찬 종류만 무려 90여 가지가 넘는다. 희순씨가 처음부터 다양한 메뉴를 선보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박병오

“이바지 요청이 많이 들어오고 때로는 제사 음식도 주문이 들어오곤 하니 대학 다니는 딸과 비 오는 겨울밤에 제사음식을 만드는데, 아이들한테 어찌나 미안하던지. 딸들이 비닐에 그 많은 음식을 같이 포장해 주면서 엄마를 매우 안쓰러워 하기도 했어요. 넓은 곳에서 편안하게 음식을 하고 싶다고 부처님께 얼마나 빌었다고요. 편안하고 넓은 공간에서 손님들에게 정성을 다해 음식을 해주고 싶다’며 108배도 했어요.”

인터넷 쇼핑몰을 접은 뒤로는 가게에서 만든 김치를 공판장에 납품하거나 농협에 판매하려고도 했지만, 개인소매업자로서는 절차가 까다로워 그만두었단다. 하지만 사업을 좋은 방향으로 확장해보고 싶은 마음은 더욱 커지는 듯하다. 옆 상가를 인수해서 보리밥집을 차리고, 맛난 반찬과 된장으로 저렴한 값에 내놓았다. 3500원에 파는 보리밥은 장날에만 200그릇이 넘게 팔린다.

“나는 이제 사회에 조금 더 도움 되며 살고 싶어요. 자식들은 이제 장사를 그만하라고 해도 오랜 세월 쌓아온 노하우와 사업을 그냥 없던 일처럼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워요. 이 사업과 나의 인생의 자취를 좋은 방향으로 남기도록 제 노하우가 잘 쓰였으면 좋겠어요. 살아오느라 생각하지 못했던 감사함을 현재는 깨닫게 되었어요. 이제는 봉사라는 방향으로 실천하고 싶어요. 사회적 기업처럼, 세상에 어떤 방법으로 기여할 수 있을지 고민이에요.“

<엄마손반찬>이란 이름으로 오랜 세월 언양전통시장에 자리해온 만큼 시장에 대한 애정과 시장을 찾는 사람들을 향한 무한한 배려가 함께 깃들어 있었다.

글ㆍ사진 이동근 작가

최경호

최경호
시저스신발 / 최경호 / 010-3568-4280

맨발의 청춘,
세상의 길 밖에 서다

언양 토박이셨던 부모님 슬하에 우리는 모두 칠남매였다. 보리 흉년이던 계미년, 모두가 어렵게 보낸 그 해. 형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던 시기였다.
아버지께서는 집안 형편이 어려우니 한 해 쉬고 그 다음 해에 학교에 보내주겠노라 말씀하셨다. 식구가 많아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던 그 시절.

지게를 지고 땔감을 하러 다녔지만 집안 형편이 나아질 거라는 확신은 들지 않았고 학교에 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울산에 있는 신발을 판매하는 곳의 직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묵묵히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니 짧은 시간에 사장의 신임을 얻기도 했다. 그 당시 신발공장은 대부분 부산에 위치했다.

신발의 종류라고 해봤자 검정고무신, 노랑고무신, 교복에 신고 다니던 바보신, 고등학생이 신던 육상화 등이 전부였지만, 신발은 늘 사람들이 신어야 하는 소모품이라 경기를 타지는 않았다. 고무신을 생산하던 곳 중에는 부산에 위치한 삼화고무, 국제고무 등이 있었고 나는 말표고무신, 태화고무신이라고 적힌 상표의 신발을 팔고 있었다.

당시는 오늘날처럼 신발 매장에서 장사를 한 것이 아니라 장날에 맞춰 신발을 직접 팔러 다니던 시대였다. 2일날 열리는 언양장을 중심으로 3일은 경북 입실장, 4일은 경주 불국사, 5일은 울산장 등으로 보따리장수 마냥 신발을 팔러 다녔다.

‘장차’라는 트럭 위에 짐을 싣고 우리는 그 안에 몰래 숨어서 이동을 하기도 했고 그나마 여건이 녹록치 않으면 부산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짐을 실은 차가 도착하기를 역에서 몇 시간 동안이나 기다렸는데 예삿일이 아니었다.
열일곱에 시작된 나의 신발 장사는 군대에 가기 전까지도 계속되었고, 기갑부대에서 무사히 군복무를 마친 후 다시 신발 장사를 해볼 생각을 갖고 있던 찰나에 태화고무 사장과 면담을 할 기회가 생겼다. 스물일곱 되는 해에 중매를 통해 결혼을 하고, 태화고무 사장의 도움으로 개인 사업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 보따리장사를 했던 어린 시절처럼 3명의 직원을 고용하여 장날에 맞춰 물건을 팔러 다녔다. 종업원이었던 때에는 몰랐던 어려움도 있었다. 신발은 많이 팔아야만 이윤이 남는 장사였고 인건비와 식비, 교통비 지출이 많았기에 직원들의 삼시 세끼 해결은 물론 빨래도 해주어야 했다. 그 모든 궂은일을 지금의 아내가 함께 장삿길에 올라 도맡아 하게 되었다. .

박병오

1988년 2월, 물건을 보관하던 상가에 큰불이 나 창고 안의 모든 물건이 재가 되어 버렸다. 전 재산이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찰나, 보험회사 직원이 찾아와 가입하라고 권유했던 화재보험이 생각났다. 지금 생각해도 그것은 우연이 만들어낸 천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보험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다시 시작할 수 있었을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어떤 상인이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정말 열심히 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순탄치 않은 인생의 굴곡을 지나쳐 오지 않은 이도 없다. 신발은 사람의 두 발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 출시된 수많은 신발 중에 고무신은 유독 나의 인생을 이만큼 살아내게 도와준 버팀목이었으며 나의 인생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글ㆍ사진 이동근 작가

최금자

박병오
언양원조참기름 / 최금자 / 010-2560-1281

언양시장
언양참기름.

유년 시절의 언양전통시장은 지금처럼 잘 정돈되어 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재래시장이었으며, 원산지 표기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필리핀 노점상 같은 행색이었다.
시장 안의 ‘언양참기름’은 원래는 어머니의 친정에서 운영하시던 것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농사를 짓고 사셨는데, 친척분께서 당신께 기름집을 이어받아서 해보지 않겠냐고 하셨단다. 부모님께서는 일구던 논 세 마지기를 팔아 점포를 인수하셨다. 그때가 내가 중학교 졸업할 무렵이었다.

농사와 달리 장사를 하면서부터 집에서 매일 현금 다발을 구경할 수 있었다. 저녁이 되면 온가족이 모여 앉아 돈뭉치를 세고 정리를 해야 했다.
그땐 부모님이 벌어온 돈뭉치가 모두 우리 돈인가 싶어 용돈을 달라며 떼를 쓰곤 했다. 그 돈이 모두 재료를 떼어올 장사 밑천인 걸 알게 된 지금 생각하면 철없던 시절로 부모님께 죄송스럽고,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하다.

부모님이 장사를 시작하고선 줄곧 가게를 돌보시느라 집안일은 온전히 장녀인 나에게 맡겼다. 친구들은 방과 후에 이곳저곳 놀러 다니는데 나는 봄에 못자리를 보는 것부터 겨울 김장까지 온갖 일을 도맡아야 해서 짜증나고 서러웠던 철부지였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여태껏 삶의 고비를 잘 넘겨왔던 것은 그 시절 부모님이 가르쳐 주신 생활의 지혜 덕이 아니었나 싶다. 시집 좀 가라고 언성을 높이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7년이 지나, 그 때의 내 나이만한 자식 셋을 둔 지금, 내가 어머니의 뒤를 이어 가게를 꾸려가고 있다.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다. 내가 젊었을 적에는 부모님이 장사하면서 고생하시는 거 보고서 ‘난 절대 장사는 안 하겠다’ 마음을 먹었지만, 세월이 흘러 지금 그 자리에 내가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때 부모님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는 것이. 먼 훗날 우리 딸도 내가 장사하는 걸 보면서 철없던 시절의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박병오

언양에 방앗간이 많음에도 어머니 때부터 오랜 시간을 해오다 보니 우리 집을 기억하고 찾아와 주시는 손님들이 많다. 동창들도 다 언양에 살고 있어서, 시장에 오면 꼭 발걸음하기도 한다. 수영장에서 우연히 만난 육회집 사장님과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도 물건을 공급하고 있다. 시중에 파는 기성품과는 맛이 확실히 차이가 나니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오고, 한 번 온 사람은 또 온다. 이렇게 40년 가까이 방앗간은 돌아간다. 그 인연과 지난 시간만큼 우리 집 기계는 계속 나오는 ‘더 좋은’ 기계들에 밀려 이제는 구식이 되어버렸다. 세월이 비켜갈 수 없는 것이 사람뿐만 아닌 것이다. 고춧가루 하나를 내도 다른 집 기계는 고추를 부어넣고 버튼만 누르면 되지만, 우리 집 기계는 막대로 누르고 저어줘야 한다.

가업을 이어가는 사람으로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예전과는 달라진 기름맛이다. 물론 마트에서 파는 미얀마, 티베트산 깨로 내린 기름보다야 훨씬 좋지만 촌에서 농사지어 나온 국산 깨로 내려먹던 시절의 맛과는 비교가 안 된다. 농사를 지어 나온 참깨, 들깨를 직접 가져와 기름을 내리던 그때는 참깨 1kg에 두 병, 들깨는 한 병이 나오며, 그 양에 맞게 병도 직접 들고 왔다. 참기름이 조금 필요할 때는 박카스병에 담아놓은 소량을 사가기도 했다. 일 년에 두 번 우리 가게에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명절에는 제사음식에 쓸 기름을 사려고 찾아온 사람들이 많아 줄을 서서 받아갔다. 내가 번호표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참기름이 귀하던 그 시절은 기름집을 하는 우리 집에서조차 명절에나 기름 발라 구운 김을 몇 장 먹어볼 수 있을 정도로 귀했다. 어릴 때 엄마가 내려온 기름은 참 고소하고 맛있었다..

어머니와 나의 오래된 손님들이 잊지 않고 기름을 사러 오는 공간
결혼 안 할 거라며 시장통이 떠나가듯 아버지랑 싸우던 공간.
지금은 나와 우리 엄마 보러 자식들이 찾아오는 공간.
한 자리에서 오롯이 그들을 기다리며 시간이 흘러갔다. 켜켜이 쌓아올린 추억과 기억이 언양참기름에서 공존한다. 나의 가업은 그 시간과 기억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늘 이 자리에서 머무르며 살고 싶다.

글ㆍ사진 이동근 작가

허순연

박병오
수미한복 / 허순연 / 010-9989-4830

아버지께서 내게 한복을 배워보지 않겠느냐고 하신 말씀에 오랫동안 한복을 만들어 오셨던 분의 댁에서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내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옷을 만드는 일에 꽤 재능이 있었던 듯하다. 소문을 들은 동네 이웃집 아주머니들이 옷을 만들어 달라며 많이들 의뢰해 왔다. 한복을 만드는 일을 배우기는 했지만 집에는 미싱조차 없던 상태였다. 당시 해양경찰로 근무를 하던 오빠에게 미싱을 마련해 달라는 부탁을 했고, 오빠는 미싱을 사라고 첫 월급을 떼어 주었다.

그 시절에는 아이들 운동회나 관광버스를 타고 단체관광을 갈 때에도 한복을 입고 갔으니 지금과는 달리 한복이 보편적일 뿐만 아니라 한복에 대한 애정이 넘치던 시대였다.
비록 최선을 다해 배우긴 했지만 실전 경험이 부족했으니 잘 할 수 있을까 걱정되고 자신감이 부족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이웃 아주머니께서 단체관광을 가는데 급하게 한복이 한 벌 필요하다고 부탁을 해서 밤을 새서 부랴부랴 한복을 한 벌 만들어드렸다. 당일 날 아침까지 열심히 만들어놓고도 실전 경험이 부족했던 터라 잘 만든 건지 걱정되더라. 그래서 한복을 보는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러 관광버스를 타는 곳까지 동행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예쁘다는 반응에 안도하며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집에서 미싱 한 대에 의지하며 작업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한 포목점에서 함께 작업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들어와서 몇 년을 포목상에서 일하게 되었다. 경험은 부족했지만 늘 끊이지 않는 일거리에 행복하고 감사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무렵, 내 나이 스물네 살에 중매가 들어왔다. 시집을 가기로 결정이 될 무렵 친정 부모님은 시댁에서는 한복을 만드는 일을 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셨다. 육아만 하는 것도 힘든데 일까지 하게 되면 혹여나 몸이 상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나온 말씀이었다. 친정 부모님의 말처럼 나 역시 집안일과 옷 만드는 일을 병행할 자신은 없었지만, 부모님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미싱을 가지고 있으면 쓸모는 있을 것이란 판단에 시집 갈 때 몰래 챙겨서 갔다.

어느 날 시댁 큰어머님의 환갑잔치에 미리 얻어놓은 옷감으로 한 벌 만들어드리면 뜻 깊은 선물이 되겠다는 생각에 한 벌 지어드렸다. 잔치에 놀러 온 동네 사람들이 보고 순식간에 소문이 퍼져 이웃들 사이에서 한복을 만들어 달라는 의뢰가 또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다시 한복을 만들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게 우연이 만들어낸 필연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늘 자정을 넘긴 시간까지 일이 이어졌다. 옷을 만드는 일은 즐겁지만 임신을 하고 출산이 가까워 오니 힘든 것도 사실이다.

박병오

한복, 언양을 입다.

아이를 출산하고, 언양시장이 공사를 마치고 3년이 지날 무렵 점포를 마련하여 포목점을 열며 옷을 제대로 만들어보겠다고 다짐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이 셋을 키우는 데에도 최선을 다했고, 옷을 만드는 일에도 최선을 다했다. 남의 집 셋방살이를 전전하면서도 매달 12만 원의 적금을 빼먹지 않고 부어서 마침내 처음으로 ‘우리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아파트도 마련했다. 늘 단칸방에서 비좁게 웅크리며 자던 우리 집 삼남매가 신나했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이 시장, 내 점포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스쳐 지나며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가장 의미 있는 일은 내가 만들어준 옷을 입었던 손님들이 여전히 지나가며 들러서 인사도 하고 친구처럼 지낸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포목이 예전같지는 않지만 여전히 부산, 울산, 심지어 대구에서까지 믿고 옷을 맞추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 이 일은 한 올 한 올 정성이 들어가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건강이 허락되는 그 순간까지 늘 지난 날 처음 옷을 만들어 내놓던 초심의 마음으로 이 자리에서 손님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글ㆍ사진 이동근 작가

천무술

박병오
옹기집 / 천무술 / 010-9232-8443

나는 태어나서 살아온 긴 세월 동안 고향을 떠나 본 적이 없었다. 추억이 남아 있는 삼호동 옛 집은 아파트를 짓는다며 먼지처럼 사라져 버렸으며 형님과 아버지와 함께 한 옹기 공장 또한 먼지처럼 흩어져 버렸다.
의지하던 형님도 나보다 먼저 먼 길을 떠나셨지만 나는 여전히 이곳에 있다. 어렵고 힘들던 가정형편에 군대를 다녀온 뒤 아버지와 형님과 함께 옹기 공장을 운영했었다. 기술을 배워오느라 꽤나 애를 먹었다. 옹기 일을 배우기 위해 3년을 공짜로 일해 주며 기술을 습득했지만 그럼에도 시간은 부족했고 완벽히 배워지지 않았다.

큰 장독 하나를 만들기 위해선 이틀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한 명은 물레를 돌리고, 한 명은 다듬는다.
이 옹기라는 것이 굽는 과정에서 크기가 조금 줄어들기도 하는데 일반적으로 제일 많이 쓰는 게 50리터, 40리터짜리 항아리다. 지난 세월 장인들은 혼자서 이 항아리를 하루에 30개씩 만들었는데, 요즘은 여러 명이 분업으로 주둥이, 기둥, 바닥을 따로 만들어서 붙인다. 요즘은 아무래도 기계가 많은 부분을 담당하기 때문에 예전에 비해 훨씬 많은 양을 생산할 수 있다.

시대가 아무리 좋아졌다고는 해도 옹기라는 것은 기계로 할 수 있는 부분이 다른 물건들에 비해 매우 적다. 기계가 모양을 만들어줘도 손으로 수백 번씩 다듬어줘야 하고, 흙과 재를 섞어서 칠하는 모든 일은 사람이 해야만 한다. 이 과정이 끝이 아니다. 완성된 뒤에는 잘 말리고 숙성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다 완성시키고 나서도 속까지 말리는 20일의 과정이 필요하다. 옹기 하나에 수많은 손길과 시간이 필요하다.

땀을 흘려 최선을 했다 한들 모든 옹기가 A급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반죽하고 빚고 칠한 대로만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아궁이에 불을 때는 것에 따라서 실패하기도 하고 다른 여러 요인들 때문에 기대한 만큼의 모양이 나오지 않을 때도 있다. 공들여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선 모든 항아리를 A급이라고 쳐주고 싶지만 마음보다도 눈이 먼저 등급을 다 매기고 있다.

박병오

옹기장이로서의 삶이 비록 수월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다함께 힘들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후회하거나 손해 보았다는 마음도 들지 않는다. 배가 고프니 하나라도 제대로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최선으로 다했다. 내 아내 역시 나만큼 많은 고생을 했다. 사람들은 옹기 하나에 그만큼의 고생이 들어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옹기를 보고 다들 왜 이렇게 비싸냐고 할 수도 있다. 만드는 과정을 지켜 본 사람은 그 과정이 작품을 빚어내는 것이란 걸 알게 된다.

옹기는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그릇이다. 옹기는 숨을 쉬는 그릇이기 때문에 음식을 숙성시키는 용도로 쓰인다. 장도 담고 김치도 담근다. 흙마당이 있으면 옹기를 묻을 수 있는데 요즘은 아파트라서 옹기를 못 묻는다. 하지만 묻어둘 수 없더라도 옹기에 음식을 담그는 것만으로도 그 맛은 확실히 달라진다. 아무리 좋은 김치냉장고라도, 옹기만큼 안에 든 음식을 숨 쉬게 하고 숙성시키는 그릇은 없다.

글ㆍ사진 이동근 작가

조기현

박병오
두부나라 / 조기현 / 010-3578-2140

나는 두부가게의 사장이고 내 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제부터 한 모의 두부가 잘 익기까지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두부를 좋아했다. 비싸지도 않으면서 속을 든든하게 채워 주었고 담백하고 고소하면서도 배불리 먹어도 속이 더부룩한 법이 없었다.
두부를 잘 만들어 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품고 살았다. 성인이 되어 직장을 다니면서도 두부 가게의 사장이 되는 소박한 상상을 하곤 했다. 그 상상은 직장 생활을 오래할수록 점점 더 강해지면서 신문에 두부와 관련된 기사가 있으면 늘 스크랩을 해두었고, 지인들이 맛있는 두부집이 있다고 하면 찾아가서 맛을 봐야 했다.

그리고 97년 말, IMF가 터지면서 회사를 오래 다니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명예퇴직을 하기에는 젊은 나이였지만 지금 내가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하지 않으면 앞으로 시간만 더 지체될 것 같은 초조함도 생겼다. 가정이 있는 몸이었기에 하고 싶다고 마냥 다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더 신중하고 진지하게 고민을 하다가 새로운 공법으로 두부를 제조한다는 공장으로 견학을 다녀온 뒤 98년도 6월 30일자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아내와 두부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나눠 오긴 했지만, 회사를 그만두고 장사를 하는 일에는 부인의 반대가 심했다. 나의 확고한 생각과 오랜 설득 끝에 아내는 나의 이런 각오를 믿어주었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들이 있기에 나 역시 신중했지만 아내의 지지가 없었다면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두부 맛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으려면 다양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어야 했다. 그래서 전통시장이 내가 보금자리를 틀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다양한 시장을 둘러보며 시장상인들이 얼마나 힘들게 장사를 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장사 오픈을 알리고 처음엔 정신없이 두부를 만들어냈다. 손님들이 내가 만든 두부를 먹고 “두부가 정말 고소하고 맛있네요”라 말하는 걸 들었다. 이제 장사를 막 시작한 사람에 대한 격려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점점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이 집 두부 정말 맛있네”라며 찾아오는 분들이 많아졌다.

박병오

시장을 찾는 소비자들의 칭찬 한마디 한마디를 들으며 두부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고, 사람들이 맛있다고 하는 그 맛의 공식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두부공장에서 배운 대로 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손님들의 반응을 기준으로 여러 가지 실험을 했다. 그 실험이라고 하는 것은 두부를 만드는 공정에 있어서 작은 변화를 주는 것이다. 콩을 불리는 시간이나 저어주는 정도, 간수를 치는 시간이나 끓이는 온도 등 몇 가지 포인트를 바꿔서 실험을 했다. 같은 재료를 쓰는 두부라고 하더라도 공정시간과 방법이 달라지면 두부의 맛도 천차만별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관광객들의 시식 후기를 들으며 나만의 노하우를 찾아내었고, 손님들이 좋아하는 맛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두부가 나오기까지 콩을 불리는 시간을 제하고 나면 한 시간 반 정도 시간이 소요된다. 처음 장사를 시작했을 때 구입했던 기계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모터를 교체하고 직접 수리하기도 한다. 기름칠도 직접 하고 용접도 직접 한다. 두부와 두부 기계에 관련된 것에는 최고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던 결과라고 생각한다.

내 마음이 향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나니 지금은 매우 행복하다. 다만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부족해 가족들에게 미안하다. 두부 작업은 새벽 여섯 시부터 시작해야 하고, 하루의 반절 이상을 모두 두부에 쏟아 부어야 한다. 두부는 시간 조절이 생명이다. 끓이는 시간. 콩을 불려서 갈아내는 시간, 끓이고 뜸 들이는 시간이 매우 중요하다. 인생 또한 마찬가지인 듯싶다. 준비 기간이 길어질 수 있고 그 방법이 다를 수도 있다. 실패의 눈물을 흘리는 것도 모두가 다르겠지만 무엇보다 기회가 왔을 때 열정을 다해 최선을 다하는 타이밍도 중요하다.

글ㆍ사진 이동근 작가

정영식

박병오
솥장사 / 정영식 / 011-9511-3109

‘할아버지, 살아오신 이야기 좀 해주세요.’
‘내 이야기? 무슨 이야기를 해줄꼬. 어린 시절부터 해주면 되긋나?’

내가 여기 언양면 위에 있는 상북면에서 태어나서 올 해 일흔아홉이 되었네. 젊었을 적에는 농사를 지었는데 벼농사 이기 돈이 안 되는 기라.
내 땅이 넓은 것도 아니고 넘의 논 댓 마지기 빌려 지었지. 그걸로 자식들 학교를 보낼라 카이 택도 없어. 애들 학비가 안 돼. 어르신들이 장사를 해보라 캐서, 뭘 할까 고민하다가 놋질을 시작했는데, 이건 이것대로 참 잘 안 되더라꼬. 밥장사는 여자가 하는 일이니 나는 손도 댈 수 없고, 생각을 하다가 어찌 기회가 되어서 농기구랑 농사 잡품 파는 가게를 인수받은 기지. 저기 통도사 쪽에 있는 같은 가게까지 그대로 인수를 해서, 두 가게를 장날에 하루씩 보고, 나머지 사흘은 농사를 지었지. 근데 내가 뭘 모르고 장사를 시작을 해놓으니 처음에는 참 애를 많이 먹었다네.

이 장사 시작할 무렵이 내 일생에 제일 마음 쓰이던 때라. 아이들이 다 학교 들어가야 되는데 돈이 없으니께. 너무 어려웠을 적에는 내가 사우디아라비아까지 갔다 안 왔나. 1년간 외국에서 공사하니까 돈은 좀 되었지. 근데 이 장사는 돈이 된 적이 없다. 애들 학비 좀 벌어보겠다고 시작한 건데 말이다. 내는 서당 1년 다닌 게 전부라서, 내가 공부 못한 게 한이어서 애들 공부는 잘 시켜주고 싶었거든. 근데도 우리 애들 고등학교까지밖에 못 보낸 게……. 참 미안타. 애들도 더 공부하고 싶어 했는데.
이제 이것들은 사라져가는 것들이고 장사라기보담 그냥 꾸준히 해나가는 거제. 예전에는 소 먹일 때도 솥을 쓰고, 이래저래 솥을 많이 썼는데, 이제는 다 사료 멕인다 아이가. 여러모로 요즘에는 솥을 덜 쓰니깐 우리 가게에 있는 물건은 잘 안 나간다. 요새 다들 뭐 가스에다가 요리며 뭐며 다하지 솥을 쓰나. 농기구는 농기구대로 안 나가지. 내가 예전에 농사지었을 때는 모든 게 노력이었다. 쟁기며 낫으로 갈고 뽑고, 정말 고생했지. 근데 누가 요새 영차 영차 농사 짓노, 기계로 다 하제. 요즘엔 나도 기계를 쓰니 말이다.

박병오

이제 나도 고만할 나이가 다 되었으니 이 장사를 언제 그만둘지 모르지. 다음 달에 그만둘지, 내년에 그만둘지. 한 일 년 전부터는 숨이 차서 병원에 가보이 큰 병원 가보라 카대. 그래가 또 큰 병원 가보니 협심증이라 캐. 내가 협심증이 뭔지 아나, 고마 이 숨차는 게 병이 맞긴 맞구나 했지. 이 장사를 그만두기는 해야 하는데 솔직히 아쉬워. 이런 장사 받아서 할 사람도 요즘엔 없고. 그리고 내가 이것 그만둔다고 해서 새로 할 일도 없고. 아무 할 일 없이 놀라 해도 을매나 심심할까 걱정도 되고. 그래서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여기 이렇게 앉아있는 걸 고마 논다 생각하고 지낼라고. 그러니까 내가 이래 마음 편하게 이 가게에 앉아 있을 수가 있는 기지.

평일에는 많이 안 추우면 이래 문 열고 물건 내놓고, 장날 되면 저쪽 문까지 다 열고 물건 좀 더 내려놓고 하는 정도지. 그나마 장날에는 양산에서부터 사람들이 오니 오가다 물건 한두 개 나가는 정도라. 그래도 내는 괘안타. 우리 아들 다 잘 컸고, 우리 할매 건강하니까. 농사도 짓고 소도 먹이고 이래저래 지내다 보니, 우짜든둥 얼라들도 다 출가시켰으니 말이다. 내 밑에 떨어진 자식들 보면서 그 책임감 하나로 살았는데, 잘 커줘서 고맙지. 무슨 일이든 여물게 하고 성실히 해내면 된다고 아직도 내는 생각해.

글ㆍ사진 이동근 작가

이와다레히로코

박병오
진농수산 / 이와다레히로코 / 010-5115-8368

일본 나고야 태생으로 ‘후루가와’라는 곳이 나의 고향이다. 시집을 오기 전까지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사로 일을 하고 있었던 내게 한국이라는 나라는 낯선 나라였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한 부모님들의 감정도 깊지는 않았다. 그러나 타국으로 시집을 보내야 하는 친정에서 걱정하는 이유에 두 가지가 있었다. 한국은 그 당시 가난했고, 북한과 휴전 중인 나라였으니 부모님이 걱정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으로 시집을 오고 난 뒤, 남편이 운영하던 유치원에서 아이들의 등원과 하원을 돕는 봉고차 기사로 일을 했다. 학부모들은 일본 사람이 운전을 한다는 사실에 적잖이 불안했을 것이다.

약초를 캐러 다니셨던 시댁 부모님은 부산과 울산 등에서도 소문을 듣고 약을 사러 올 만큼 유명한 약초상을 오랜 세월 운영하셨다.
그 와중에 시아버님께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했다. 뜨거운 불을 이용해 고약을 만드는 과정에서 큰 가마솥에 약초를 넣고 다려내던 아버님에게 갑작스러운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솥뚜껑을 열어둔 채 약을 달이고 계셨고 가마솥 옆에 쌓아둔 장작더미를 정리하다 그만 가마솥 넘어진 것이다 얼굴과 손을 제외한 대부분의 몸에 심한 화상을 입으셨다. 사람의 몸은 30퍼센트 정도의 화상으로도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 한국말과 경상도 사투리를 알아듣는 것이 지금처럼 익숙하진 않았던 시절이었지만, 당장 거동이 불편하신 시아버님을 간호하는 것은 당연히 나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화상의 정도가 심해 진물이 흐르는 아버님의 몸을 닦아내고 여러 가지 수발을 드는 일을 내 일이라 생각하고 도맡아 했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 며느리였음에도 아버님은 나에게 매우 다정한 분이셨으며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신 분으로 여전히 기억된다.

영남 알프스의 칠봉 중의 하나인 고운산 아래에서 30년이란 세월 동안 큰 양계장을 운영하시는 아주버님께서 싱싱한 계란을 공급해 주셔서 요즘은 장날마다 장사를 한다. 배달과 판매 두 가지를 병행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내성적이던 성격도 자연스레 바뀌게 되었다. 시장 상인분들로 인해서 한국 사람의 장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가게를 하다 보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도 많아지고, 친해지는 상인분들도 있는데 즐겁고 행복한 일이 있으면 맛있는 것도 나눠먹고,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무슨 일이 있는지 꼭 물어봐주신다. 한국 사람 특유의 진솔한 情을 나누는 것이 일본에서 태어나 타국으로 시집 온 내가 언양시장 상인들을 통해 느낄 수 있었던 매력이다.

박병오

계란으로 해먹는 요리가 많고 다양하니 계란을 고를 때 좋은 계란을 고르는 방법을 알면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 계란에 다른 계란과 차별점이 있다면 양계장을 운영하시는 아주버님께서 닭에게 쏟는 애정의 차이라고 볼 수 있겠다.

닭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늘 환경을 깨끗하게 하고 닭이 먹는 물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 우리 계란을 낳는 닭이 먹는 물은 고운산 정기가 깃든 지하수이다. 대부분 마트에 들어가는 계란들은 모두 깨끗하게 씻어 코팅을 한 상태로 납품을 한다. 하지만 계란은 절대로 물로 씻어서는 안 된다. 어미의 품에서 나온 계란을 보호하기 위해 계란 껍질에 형성된 막을 물로 씻어버리면 나쁜 균이 계란에 스며들어 싱싱함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 계란은 장날이 시작되는 이른 아침 어미의 품에서 나온 계란을 가져온 것이기 때문에 우선 신선도 부분에서 믿고 살만하다는 장점이 있다. 또 가져온 계란의 수량이 모두 소진이 되고 나면 다시 양계장으로 가서 최대한 좋은 환경에 있는 것들을 가져온다. 가끔 마트에 진열되어 있는 계란들을 보면 날짜가 표기되지 않은 계란도 있다. 그런 계란은 양계장에서 바로 오는 것이 아니라 공장을 거쳐서 오기 때문에 날짜를 분별할 수 없으며 비린내가 많이 난다. 때때로 마트에서 계란 가격을 낮춰 파는 일이 종종 있는데 그런 것이 어떤 계란인지 알 만하다. 소비자들이 좋은 계란을 구분하는 방법만이라도 알고 가족의 입에 들어갈 신선한 계란을 구입했으면 한다.

글ㆍ사진 이동근 작가

이미화

박병오
종로떡집 / 이미화 / 010-3851-6720

내 소원은 우리가족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

내가 껶어온 삶의 가장 큰 위기는 내 소중한 사람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지 못하는 순간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도 깊은 수령으로 빠져드는 것 같고 가슴 철렁했던 순간의 연속이었다. 내 나이 서른 두 해가 되었을 때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 생활을 시작했으니 다른 여인들에 비해서 늦은 편이었다. 결혼하고 난 뒤 얼마 안있어 친정엄마가 쓰러지셨다. 오래오래 내 곁에 머물러 계실 줄 알았던 엄마는 3년 뒤 홀연히 내 곁을 떠났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픔이 채 가시지 않을 그 무렵, 엄마의 뒤를 따라 여동생이 암으로 세상을 뜨고,친정어머니도 돌아가셨다.
소중한 사람들이 연달아 내 곁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며 아픔을 가슴에 새긴 시간이었다.

쓰나미처럼 밀려온 슬픔

어느 날 뇌출혈로 시어머니께서 쓰러지셨다. 의사의 말로는 재발하게 되면 치매 증상은 동반 할 수도 있다고 했다.
호전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시어머니의 의지와 가족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치매로 인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리셨다.
결혼과 동시에 많은 아픔들이 나를 찾아왓고, 급기야 시어미니까지 몸이 편찮으시니 내 몸과 마음도 많이 지쳤다.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나는 '자신을 버리자'라는 마음으로 살았다. 결혼 전 나의 자유롭던 생활은 존재한 적 없는 것 처럼 말이다. 흡사 아이가 되어 버린 듯한 시어머니의 식사를 챙길 때면 떠먹인 밥숟가락으로 나도 함께 밥을 먹으며 시어머니의 침과 변을 다 묻혀가며 살았다. 사촌 시누이가 어느날 그 모습을 보더니 가식적이라는 말을 하기도 할 정도였다. 자식도 하기 힘든 일을 며느리가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이유없이 한 말이거니 생각했고, 그 때 당시에는 내 모든 신경은 시어머니께 향하고 있었던 터라 다른 말과 행동에 상처를 받을 겨를 조차 없었다. 치매환자가 집안에 한 명 있는 것만으로도 그 가정은 함께 병이 든다. 같이 우울하고, 웃을 일이 없는 것이다.

"나만 희생하면 온 가족이 편하게 지낼 수 있다"라고 힘든 순간들을 입술을 깨물며 참고 버텼다. 요즘 같으면 이혼하거나 도망갔을 일이다. 그렇게 나를 슬프게 하던 세월이 무색하게 어머니는 한 날 가셨다. 시골집이라 장례도 집에서 했는데, 초상 치를 때 시댁 어른들께서 처음으로 나를 향해 위로와 인정의 말들을 건네셨다. 13년의 세월이 짓누르던 무게에서 처음으로 벗어났지만, 그 빈자리의 허탈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 공허함과 허무함 때문이엇는지 내게 우울증이 찾아왔다.

박병오

우울증 역시 내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에는 충분했다. 모든 것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 내 아이들을 태우고 가는 차 안에서조차 생각해서도 안 될 마음을 먹게 될 만큼 우울증이라는 병은 위태로웠다.
아무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힘들어 하던 때에 떡집을 운영하던 친구가 내게 매일같이 전화를 걸었다.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떡집에 한번 들러서 이야기도 나누고 놀다 가라 했다. 그나마 그 시간이 나쁜 생각을 덜 갖게 만드는 시간이어서 수다도 떨고 떡도 먹고 일도 거들어 주곤 했다. 집에 우울하게 있지 말고 가게 일을 도와 달라고 해서 정식으로 일을 도와주러 가기 시작햇는데, 그때는 몰랐다. 친구는 떡집을 이제 내려놓고 다른 이에게 넘겨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을 바로 나로 혼자 점찍어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예기치 못하게 떡 만드는 법을 배우게 되면서 내 나름대로 떡 만드는 일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는 떡도 맛있지만 만들어서 파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현금이 오고가는 시장이고, 각종 경조사 및 행사 등에도 떡은 늘 필수이니 충분히 돈을 벌 수 잇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잠시 식당일을 할 때, 아이들을 돌볼 수가 없어서 어디에 맡겨두고 일을 가곤 했던 것에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았다. 떡을 만들어 파는 일보다도 이번에는 아이들에게 먼저 물어보고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 나을 듯 싶었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엄마가 무언가 일을 하면서부터 달라진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을까? 그 어린 마음에서 엄마가 떡집을 했으면 좋겠다고 혼쾌히 말을 해주어 너무 고마웠다. 길고 어두웠던 '내가 존재하지 않는 나의 삶'을 거쳐, 지금 언양알프스 시장의 종로떡집이 새롭게 시작된 것이다.

새로운 시작 앞에서...

떡의 종류는 무궁무진하며 직접 메뉴를 개발 할 수도 있다는 장점도 있다. 떡집에 마음을 두고 좋은 떡을 제대로 만 들어서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내가 직접 고른 좋은 재료를 아끼지 않고 듬뿍 넣어 떡을 만든다.그래서 우리 집은 다른집보다 가격이 조금씩 높은 편이다. 시골 시장에서 가격 높으면 된소리를 많이 듣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신뢰를 줄 수 있는 떡을 만들어 제공하다 보니 이제는 소비자들도 가격이 높은 이유를 이해해 주시기 시작했다. 국산 쌀로 만드냐고 묻는 분들도 있다. 남성분들이 의외로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들이 많아 아주머니들은 '우리 아저씨 때문에 이 집 떡을 꼭 먹어야 한다'며 사 가신다. 떡집을 시작하고서 새벽에 일을 나오니 아침에 딸아이 머리도 묶어주지 못하고 학교를 보냈던 것이 참 미안하다. 엄마를 배려해주고 깊고 어진 마음을 지닌 딸로 자라주어 너무 고맙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산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이 행복하다. 그리고 내 남편과 내 아이들이 앞으로 계속 건강하다면, 더 이상 소원이 없겠다.

글ㆍ사진 이동근 작가

이순자

박병오
큰애기농산 / 이순자 / 010-5544-5757

행복한 열매 따가세요.

상남에서 태어나 남편을 만나 언양 남부로 시집을 오게 되었다.
언양 토박이인 남편과 결혼하고서부터 언양알프스시장에서 37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며 수 많은 추억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이제 이곳은 엄연히 나의 제 2의 고향과 다름없다.

언양알프스 시장에서 판매를 하지만 상남에는 500평이 넘는 큰 애기농산의 대형 창고가 있다. 그 안에 냉장창고 및 작업장이 있으며,이곳에 과일을 저장해두고 포장 작업을 하여 마트나 공판장에 출하하고 가게에서 판 물건도 준비한다. 남편은 도매상을 하고 내가 소매상을 하고 있다. 유년 시절부터 나는 장사를 하게된다면 꽃이나 과일 장사를 하고 싶었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이니 말이다. 안치환이 노래에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고 외치듯, 나도 가지각색의 이야기들이 있을 것만 같은 과일을 건네는 일이 사랑스럽다.꽃집도 했으면 좋았을 테지만 지금은 이렇게 과일에 둘러싸여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 과일을 구매하는 손님들이 예쁘고 싱싱하고 맛있다고 칭찬하니 고래도 춤을 출 판이다. 과일을 파는 상인으로서 그것만큼 기쁘고 바람된 일이 있을까?

처음 장사를 시작할 무렵에는 지금처럼 모든 것이 풍족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과일이 귀하고 비쌌다. 사람들이 5일에 한 번 장이서는 날에 과일을 사면서 자식들과 손주들에게 줄 마음에 행복해 하는 것을 보며, 부모의 마음이란 자식에게 좋은 것 하나 더 먹이고 싶은 마음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언양의 장날을 생각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북적북적 발 디딜 틈없이 빼곡하게 찼는지 모른다. 장날이 되면 언양 뿐만 아니라 울산,대구,부산 등에서 나와 이곳은 시장이 아니라 잔치판 같은 분위기였다. 언양 인근의 다섯 개면 사람들은 물론이고 밀양에서도 장날이 되면 새벽 2시에 일어나서 언양알프스시장까지 걸어서 오고는 했다. 또 유흥이라고 할 것은 없지만 시골에서는 재미난 구경거리는 온통 장에 가득했다.

박병오

겉으로 보며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이는 내게는 2급 장애가 있다. 20여 년 전 과일 트럭을 몰다 가다 기차에 치여서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다친 곳으로 인해 생긴 장애다. 홍수가 나서 다리를 쓰러져 떠내려 가버릴 정도로 많은 비가 내렷던 그 해, 철로 옆에 만들어 놓은 임시도로를 건널 때였다.철길 옆이 과수원이라 탱자나무가 있었고, 비로 인해 가려진 시야 때문에 기차가 오는지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많은 비가 퍼부었다. 남편과 내가 탄 차가 한순간 팽이처럼 돌아서 꼬꾸라졌다. 병원에서는 일주일을 못 넘길 거라고 했지만, 나는 살아야 했다. 가족들과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말할 정도로 호전되었지만, 그 이후 내 몸의 절반은 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쓸 수 있을 정도의 힘이 남았다.

큰애기농산으로 상호를 바꾸면서 수입이나 수출을 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서 사업자등록도 냈다. 우리 가게가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여도, 여기서 마트와 공판장으로 출하를 많이 한다. 마트로 납품하면 마진은 턱없이 부족하지만, 돈보다는 우리 상호를 알릴 수 있는 홍보의 기회로 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40년이라는 시간 동안과일 장사로 살아온 나는 이제 나이도 많고,자식들도 다 키워 시집장가 보냈기때문에, 다른 미련은 없다. 돈에 억척스러울 이유도 없지만 전국에서 과일하면 우리<큰 애기농산>에서 사고 싶은 그런 과일 가게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 나의 마지막 남은 포부이다. 우리 상호가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며, 우리 이름을 보면 무슨 과일이든 믿고 살 수있도록 신뢰를 주는 것이다.

글ㆍ사진 이동근 작가

장병국

박병오
수입코너 / 장병국 / 010-5543-5161

할머니부터 지켜온 이 자리에서 가게를 운영해온 지 6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어느덧 내가 삼대 째 이 자리를 지켜가고 있다.
나에겐 언양 전통시장이 고향과도 다름없다. 지금도 기억하는 어릴 때 내가 살던 남부리 137-47 장터 2길 32번지 가 우리의 소중한 보금자리였다.

언양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시장 안에 집이 있다 보니 시장이 돌아가는 생리 와 생태를 자연적으로 접할 수 있었다. 오래전 언양시장에는 지금과는 달리 우시장, 염소, 닭을 취급하는 가축시장 도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지금은 시장의 면적이 많이 줄어들어 대부분이 모두 사라졌다. 여전히 위태로운 사리 (공예품), 옹기 등 전통시장의 모습 도 현저히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내가 어릴 때 보았던 언양시장은 그 범위가 넓었다. 개인 사유지 가 아닌 공유지가 많으니 그 자리에서 장사를 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았다.

개인 사유지로 땅이 점차적으로 줄어들다 보니 노점 상인들이 살아갈 수 있는 여건도 줄었고 그것은 바로 언양 전통시장 의 위기로까지 찾아오게 되었다. 지금은 5일장이 되어도 내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는 언양 전통시장의 분위기는 느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5일장이 들어서는 시장은 영화에서 보는 화개장터처럼 사람과 사람 간의 정 또한 두터웠다. 현재는 상인들도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위태롭다 보니 사람은 많아졌지만 인정이 메마른 느낌도 든다.

친구들과 하루에 가 저물어 가던 무렵 소를 팔던 어른들이 막걸리 한잔하며 흘렸던 동전들을 주우러 다녔던 것이 기억난다. 아저씨들이 시원한 막걸리 한잔 걸치며 흘린 동전들은 소똥에 묻혀 보물찾기 하듯 막대기로 땅을 휘저어 찾아내야 했고, 동전을 찾으면 며칠간은 용돈이 될 정도로 동전을 많이 흘리곤 했다. 할머니가 오랜 세월 소고기국밥 장사를 했지만 쉽게 맛을 보기는 힘들었다. 그만큼 음식도 귀하고 돈도 귀했던 시절이었다.1원 이면 눈깔사탕을 몇 개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먹을 수 있던 시절 힘들게 구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였기에 지금처럼 넘쳐나는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잘 이해를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부모님 슬하에 삼 형제였던 우리는 벚꽃이 피는 봄이 오면 소달구지에 그릇을 싣고 벚꽃을 구경하러 오는 관광객들에게 국밥을 팔기 위해 그곳으로 찾아가기도 했다.

박병오

돌아가지 못할 소중한 추억들이기에 더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것 같다. 상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내 이웃이 더불어 잘 살아야 내가 잘 산다는 사고방식 이 필요하다. 요즘은 어느 시장이더라도 어느 집의 종목이 대박이나 고 잘된다고 소문이 나면 같은 업종으로 바꿔버리기도 하는데 그런 생각으로 장사를 하는 것은 시장의 전문화가 사라지는 일이다.

삼 형제 중에 장남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업을 이어받게 되었다. 처음부터 자영업을 했던 것은 아니고 군대를 다녀온 뒤 농협에 들어가 2년 정도 부산으로 출, 퇴근하며 직장생활을 했었다. 가게를 이어받은 뒤 옷 장사 와 메리야스 장사를 했다. 현재는 기념품 등을 판매하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을 조금 더 덧붙이자면 시장에 젊은 층이 흡수되어야만 시장은 살 아날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믿는다. 그 장사를 지속하지 못 했던 나의 과오는 젊은 층을 타깃으로 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잘못이었다. 나름대로 해왔던 노하우 가 있어서 업종은 바뀌었지만 장사는 늘 계속하고 싶다. 미대에 재학 중인 막내아들에게 늘 당부하는 말이 있다.
서른 살 까지는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보고 이 자리에서 대를 이어하고 싶은 것을 해보라고 말이다. 자신이 가진 전문분야를 잘 살려 할 수 있는 일을 목표로 한다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 모든 젊은이들이 고향을 떠나 서울과 외국으로 간다고는 하지만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며 고향에서도 얼마든지 목표를 잘 세우고 계획대로 밀고 나간다면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펼 칠 수 있다고 말이다. 면적이 축소된 현재의 언양시장은 품목이 다양하지 못하다는 안타까움도 있지만 전통이 있는 언양시장인 만큼 5일 시장의 물건을 파는 상인들의 마인드도 변화해야 하고 문화적인 지식도 가져야 할 것이다. 이제 시장은 물건만 판다고 해서 지속성이 유지되는 시대는 아닌 것 같다. 마트에 밀려 상인들의 자존감에 보이지 않는 상처들이 새겨지고 있지만 언양의 전통 있는 시장으로서 힘든 이시기에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할 시점이다.

글ㆍ사진 이동근 작가

최두화

박병오
백마숯불갈비 / 최두화 / 010-9235-0335

24년 동안 소고기·돼지고기 숯불갈비 집을 운영해왔다. 친구가 운영하던 연대 앞 가게에 사정이 생겨서 주방을 대신 봐주며 운영한 가게이다. 어느 날 가게를 찾아온 손님 중에 독일에서 온 교포가 있었다.
현지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지금까지 먹어본 갈비맛과는 다르다며 서독의 요리사로 초빙했다. 우연찮게 얻은 기회였다. 그땐 요리사자격증도 없이 주부로 살던 때였던 터라, 그날 이후 자격증을 따기 위해 요리학원에 등록을 했다.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특강수업을 받은 첫날 실기시험을 치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이었지만 주부로 살아오며 요리 하나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탕수육, 토스트를 만들어야 하는 과제에서 놀랍게도 1등을 했다. 하루는 원장님이 조용히 나를 호출해 학원에서 보조로 함께 일해 보면 좋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어서 잠시 고민하기도 했지만 학원을 찾은 이유가 독일에서 일을 해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었기에 거절해야 했다. 어느 날 그 독일 레스토랑의 사장님께서 자격증이 없어도 여행 비자를 받아 독일로 와달라며 다급하게 전화를 하셨다. 얼떨결에 독일까지 입성하게 된 나는 서독에 위치한 코리안 레스토랑에서 김치와 불고기를 만들게 되었다.
그곳에서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독일인들은 대부분 식사시간이 긴 편이다. 고기를 굽기 위한 가스버너가 4시간씩이나 켜져 있으니 무리가 없을 리 만무했다. 가스버너에 가열되는 열이 높다 보니 버너에서 불이 난 것이다. 폭발하면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할 수 있었던 만큼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었지만, 불이 붙은 버너를 집어 들고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힘껏 집어던졌다. 다행히 버너의 불은 꺼졌지만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나의 용기 있는 행동에 손님들은 입을 모아 칭찬했다.

박병오

48개월이란 시간을 독일에서 보내며 나에게는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던 향수병이란 것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한국을 떠나오기 전만 해도 하고 싶은 일은 꼭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독일에 와서는 한국과는 다른 독일 손님의 매너와 품위를 비롯해서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 무엇보다 음식을 대하며 조급하지 않은 그들의 식사 예절 또한 마음에 들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이야기한 뒤 그 소중한 경험의 시간을 정리하고 나는 한국으로 다시 귀국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언양시장에서 작은 가게를 구해서 장사를 시작했다. 독일에서 벌어온 돈은 한국에서 장사를 시작하기에 여유롭지는 않았다. 권리금을 내고 나니 재료값이 없어서 항상 장사를 마치고 난 다음 번 돈으로 다시 재료를 구입해서 장사를 해야 했는데, 3개월 정도를 쉴 틈도 없이 일을 하고 나니 사람들 사이에 입소문이 퍼져 가게는 시종일관 손님들로 붐비게 되었다.

무엇보다 장사를 하는 사람은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늘 최선을 다해야 한다. 손님이 없을 땐 그 이유에 대한 반성을 한다. 입이 보살이라는 옛말처럼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에도 잘 된다 생각해야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이다. 엄마는 늘 말씀하셨다.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는 본전으로 주어라. 그러면 나머지 두 가지는 사러 온다.
손님이 저절로 많아지게 하려면 무엇보다 밥을 맛있게 하고 된장을 맛있게 해라.

지금까지도 돌아가신 친정어머니의 말씀을 되새기며 가게를 운영해 오고 있다. 전화로 재료를 주문하지 않고 직접 시장에서 구입하는 것도 하나의 원칙이다. 고기 역시 직접 보고 골라오기 때문에 고기도 최상일 수밖에 없다.
나는 지나온 인생에 대해 후회한 적이 없다. 힘든 순간도 있었고 고통스러운 시기도 있었지만 그 좌절과 시련을 나쁘게 생각한 적이 없다. 아침에 눈을 뜨는 하루하루는 언제나 새롭고 설렜다. 나는 살아온 그 시간만큼 앞으로도 내 몫을 다하여 살아갈 것이다.

글ㆍ사진 이동근 작가

김복달

박병오
하동포목 / 김복달 / 010-9585-1151

서울, 부산, 대구. 보따리 장사로 지나온 57년이라는 세월이 부끄럽지 않은 인생인 것 같다. 삼남매 공부시켜 출가시키고 이제 손주들이 예쁘게 커가는 것을 보다 보니 어느덧 다리도 안 좋고 여든이 넘은 할매가 되었다.

아이 셋을 데리고 7~8년 정도 고생을 하다 보니 단골들도 많이 생기고 자리도 잡혔다. 젊은 시절, 보따리를 머리에 짊어지고 각 지역 장날에 맞춰 다니는 일은 몹시도 지치고 힘든 일이었다. 그 고생을 어찌 말로 다 풀어낼 수 있으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 삼남매 덕분이다. 입힐 것 제대로 못 입히고 먹일 것 제대로 못 먹이며 키웠는데, 공부조차 제대로 시키지 못해서 아이들이 부모 때문에 힘든 삶을 살아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입술을 깨물어가며 버텨내었다.

언양 사람들 중에 ‘하동포목’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포목상을 해오며 천을 잴 때 쓰던 ‘자’와 ‘주판’은 지금의 나만큼이나 나이가 많다. 보자기 둘러메고 고무신 신고 학교를 다닐 때 배웠던 주산을 생업 전선에서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오랜 시절을 치열하게 살다가 이제 돌아보니 지나간 세월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과 내가 원망하는 사람들에 대한 응어리지고 모진 마음을 다 풀고 가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27살 꽃다운 처녀로 종갓집으로 시집을 갔는데 결혼생활이 평탄하지 못했다. 남편의 외도로 아이 셋을 데리고 나와 스스로 모든 것을 감내하고 살아가려다 보니 더욱 억척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박병오

88년도 서울올림픽 개최 당시 대한민국 전국이 지진이 난 듯 땅이 들썩거렸다. 시멘트 한 포대를 150원 정도에 구입할 수 있던 때에 나라에서 돈을 지원해줄 테니까 가건물 상태의 시장을 남는 땅으로 확장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울산중앙시장을 지을 당시 공사에 참여했던 사람을 수소문을 통해 알게 되어 찾아가 언양시장 확장 공사에 참여하라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몇십 년 간 장사만 해오던 상인이었기에 건축이나 건설에 대해 무지했으니, 대신 면장님을 찾아가 상세히 알아보라 일렀다. 언양전통시장의 종합상가가 탄생한 배경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다.

시장을 새로 건축하기 위해선 12명의 주주가 필요했고, 면장님은 주주를 모으는 일을 함께 도와 달라 부탁을 해왔다. 주주를 모으기 위해 집집마다 방문하며 시장이 새롭게 들어서면 어떤 이익이 있는지 설명했다. 노점상들이 모여들 것을 포함해 땅을 가진 지주들이 누릴 수 있는 이익을 오목조목 설명하느라 네다섯 번씩은 찾아갔다. 12명의 주주를 모으는 데는 3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개인사유지가 많았던 탓에 더 오래 걸린 것이다. 언양전통시장에 종합상가가 완공되고 난 뒤 밀려드는 인파에 장사는 호황을 이루었다. 상인들의 편의도 많이 나아졌다. 그렇게 공들인 시장이 요즘 불경기인 것이 안타깝다.

그래도 장사는 마음으로 하는 거다. 우선, 손님에게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상인의 인심도 좋아야 한다. 장사도 좋고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상인에게는 긍정적인 마음이 우선이다. 그것은 또 자신의 건강을 지키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찾아온 손님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여유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물건을 많이 팔아서 많은 이익을 남기려 한다면 손님은 더 멀어질 것이다. 욕심을 조금 내려놓고 손님에게 서비스하는 마음으로 다가가면 가게를 찾아온 손님 역시 나를 장사꾼으로만 생각하진 않는다. 손님이 다른 지인에게 가게를 소개해 주는 일도 있고, 그 인연으로 인해 가끔 시장에 오면 ‘어머니’라고 부르며 몇 시간 씩 말동무를 해주는 동생들도 생겼다.

상인으로 살아가는 모든 과정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시간이 지나 되돌아보면 그 고생 뒤에 이런 끈끈한 자부심이 생기는 것이리라.

글ㆍ사진 이동근 작가

김영삼

박병오
언양수산 / 김영삼 / 010-7768-3051

계절 따라 횟감 따라

횟집마다 양념 맛이 다를 수도 있고, 주인의 입맛에 따라 장맛도 다르다. 회는 활어차를 가지고 산지에 직접 가서 가져오기 때문에 언양수산은 신선도나 맛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언양에는 나이 드신 분들이 많기도 하고, 찾는 분들도 부모님 세대가 많기 때문에 회를 드실 때 씹는 맛과 목 넘김이 부드럽고 담백한 회들을 다양하게 가져다 놓는다. 늘 초심을 가지고 장사를 하면 주위 사람들도 인정하고 가게에 대한 자부심도 시간에 비례하여 단단해진다.

실패와 용기는 종이 한 장 차이

나는 울주군 온산면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언양농고를 졸업하고 울산에서 횟집을 운영하면서 장사가 잘 되어 다른 업종으로 가게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몇 번의 실패를 맛보게 되었다. 가진 것을 다 잃어버린 뒤 언양시장의 횟집에 주방장으로 들어가 일을 했다. 일을 하면서 한 명, 두 명 단골들이 생겼으며 이곳에서 자리를 잡아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제2의 인생을 언양시장에서 시작하게 된 셈이었다.

손에 쥐고 있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게 되어 그동안 고생했지만, 그 실패로 인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목표가 무엇인지 알게 된 셈이니 비싼 인생 공부를 한 것이다. 새로운 각오와 다짐으로 횟집을 운영해오며, 내 가족이 먹는다는 마음가짐으로 가격에 비례하는 양질 높은 회를 손님들에게 제공해드리려 노력해왔다. 장사가 잘 되는 비법이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 가게를 찾는 분들과 시장을 지나다니는 모든 분들께 늘 인사를 드리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자세라 생각하고 지키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김영삼

전국 재래시장의 상권이 대형마트 등으로 인해 죽어가고 있다. 그걸 헤쳐 나가는 데에는 위생, 맛, 질도 중요하지만 손님이 오게끔 하는 노력은 스스로가 만들어가야 한다. 고객을 만들기 위해서는 친절이 가장 큰 덕목이다.

아버지를 보고 자라나는 나의 아이들에게는 해주고 싶은 것은 금전적, 물질적인 것보다는 다양한 경험을 시켜주고 싶다. 그것만이 내가 아버지로서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몫이다. 아직은 달려야 할 시기이다. 내 육체가 건강하고 일에도 자부심이 있다. 언양전통시장에서 나의 남은 젊음을 함께 하고자 한다.

나는 실패와 성공을 금전적인 것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자신이 마음먹기에 따라 실패도 될 수 있고 성공도 될 수 있다. 내 몸이 건강하고 많은 손님들을 만나며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 순간 나는 성공했다.

글ㆍ사진 이동근 작가

서정목

박병오
축산물유통도매 / 서정목 / 010-3883-4487

연간 매출액 60억 규모의 식육점
큰 백화점도 아니고 도매시장도 아닌
소도읍의 전통시장 속에서 고기의 맛이라면 전국 최고를 자랑

지난 25년 이란 시간 동안 1년 365일 중 쉬는 날은 설날 하루 와 추석 하루 의 휴식뿐이다. 내가 나를 위해서가 아닌 손님의 요구와 욕구를 충족해 드리기 위함이다. 새벽 7시부터 밤 9시까지 하루 12시간 동안 고기를 다듬어 손님을 맞이하는 양 알프스 시장 고의 명물 ‘축산물 도매 유통센터’ 의 서정에 목 씨를 만났다.
그는 축산기업 중앙회 울주군 지부장을 맡아 15년간 자리매김하며 언양 불고기 축제 불고기 축제를 창설하여 불고기 특구로까지 발전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하는 동안 온갖 사회봉사로 얼룩진 모습이 칠십의 나이지만 범상치 않은 그의 얼굴에는 지난날 의 젊은 시절 모습 이 오롯이 남아있었다.
나는 1946년 해방 이듬해 가난했던 농민으로 살아오신 부모님의 8남매 중의 막내로 태어났으며 1950년 6.25 동란이 발발하고 언양 고등학교 뒤뜰에 비행장이 생겼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던 유년시절. 학교에 미군 보충대가 주둔하면서 미군 이 들끓고 있는 그곳을 지나 쓰레기 장에 버려진 통조림 깡통을 주우러 가다 누군가 던진 돌팔매 질에 맞기도 했다. 총알을 주워 화약이 복통에 좋다고 하여 먹기도 했고, 화약이 없는 빈 탄알은 뇌관을 터트리면 그 소리가 마치 총이 발사되는 것처럼 좋아 놀이로 삼기도 했다.
시골에서 가장 맛있는 것은 늦은 여름부터 익는 찰랑찰랑하며 경쾌한 소리가 나는 아편시였다. 아편시는 맛있게 잘 익었을 때 소리가 나는데 오늘날의 아편은 마약이지만 그저 배고픈 시절을 보내던 나에겐 어떤 과일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소한 열매였을 뿐이다.
해방 이전 이 일대는 일본군의 완전 무장 속에서 아편질을 따는 아편 밭이 있었다. 우리 집에는 봄이 오면 상추와 아편을 같이 뿌려 먹고 생활했다. 유년시절 아편을 많이 먹었던 탓에 내게 잔병치레는 없다고 믿기도 한 이유였다. 만 18세가 되던 해에 부산 초량역에서 야간 징집 열차를 타고 논산으로 군 입대를 했다. 군에 입대하여 후방에서 요직을 맡아 임무를 수행해오다 월남전 의 포화속으로 자원입대를 했다.

칠순이라는 인생을 살아오며 전쟁을 두 번 겼고, 두 번의 군사혁명 이 일어났다. 어지럽고 무질서 한 한국에서 나의 꿈을 무엇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고민을 했다. 전쟁은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고 평화롭고 고요했던 마을을 초토화시켜버리는 인간의 또 다른 잔혹함을 뜻했다. 그런 실망감을 안고 한국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어느 날 미국행을 혼자서 결심한 뒤 생활영어 책자를 구입하여 영어를 공부했다.

하지만 부모님이 내가 한국에 있는 것을 원하셨고 가족을 등지고 떠나는 미국행이 어찌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그 꿈을 내려놓게 되었다. 가족을 위해 미국행을 포기했지만 하루하루는 나에게 무의미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새끼 돼지 두 마리를 사주시며 여기에 정을 들여보라 권하셨다. 어머니의 권유로 키우기 시작했던 돼지 두 마리가 7년 동안 번식하여 500마리가 되었고 10년이 되었을 무렵엔 2,000마리가 되었다.

박병오

입소문에서 입소문으로 시작된 25년 전통

어느 날 문득 낚시를 하던 도중 사업의 가치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부터 마음먹은 것을 실현해보고자 고마운 분들의 도움을 얻어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도, 소매업을 시작했다.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그동안 의 아내의 노력과 정성에 고맙다. 사랑한다라는 말 한번 제대로 해주지 못하는 무뚝뚝한 남편이었지만, 주변의 평판은 나를 약속을 지키고 신뢰가 가는 의리의 사나이로 평판이 나 있었다. 개업을 했을 때 얼마나 많은 손님이 오셨는지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아도 감사한 기억이다. 그 감사한 마음을 오롯이 질 좋은 고기, 저렴한 가격으로 보답하고자 생각하며 노력한 시간들이 오늘날의 축산유통도매센터 의 현재이다. 가게가 호황을 이루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분점을 내어달라며 연락도 오지만, 아내 가 관리하는 고기 맛을 분점에서 노력한다 하더라도 그 신선도와 육질을 지속시키지 못할 것이란 판단에 한사코 거절했고, 절세미인인 아내 덕분에 고기를 사러 오는 사람보다도 부산과 울산에서 얼굴 보러 줄을 서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장날이 되면 호황을 이루던 언양 알프스 시장도 주변의 대형마트 때문인지 상인들이 힘들어한다. 그러나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환경과 여건에 절망할 것이 아니라 한번 찾아온 손님을 두 번오게 만드는 서비스정신과 물건을 더욱 품질 좋고 질 좋고 맛 좋게 다듬어야 할 것이다. 상인으로서 이익에 욕심내는 것보다 소비자들에게는 조금 더 저렴하게 제공한다면 언양 알프스 시장의 상인들의 나눔 이란 인정이 여전히 이곳에는 퇴색되지 않고 살아있음을 알고 찾아주시지 않을까 믿는 나의 믿음 이 깃들어 있는 이유이다.

글ㆍ사진 이동근 작가

박영자

박병오
동일그릇 / 박영자 / 010-9871-0447

세월 한 그릇에 담긴 이야기

우리 집은 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놋그릇공장을 했어요. 나는 울주군 언양면 동부리에서 태어났는데, 학교를 다니면서도 우리 공장의 경리로 일을 했지요. 지금처럼 연애결혼이 아닌 중매결혼을 할 때였으니 결혼도 집안에서 소개해주신 놋그릇 기술자랑 하게 되었지요. 친정아버지의 고종외사촌께서 중매를 해주셨는데, 처음에는 증조할머니가 반대를 했어요. 놋그릇 만드는 사람 만나면 힘들다고요. 경주에 뼈대 있는 가문 사람이니 괜찮다며 설득하셨죠. 남편이랑 나랑은 사실 띠동갑인데, 저는 그걸 모르고 결혼했어요. 면사무소에서 혼인신고를 하던 날 띠동갑이던 남편의 나이를 알고 나서 얼마나 우스웠는지 몰라요.

남편은 기계에서 구워져 나온 놋그릇을 깎는 기술자였어요. 살다보니 어르신들이 가게를 물려 주셔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가게를 시작했지요. 68년부터 이 자리에서 오랜 세월 동일상회라는 이름으로 장사를 하고 있는 거지요. 요즘은 다들 놋그릇을 안 쓰고 제기도 거의 스테인리스 소재를 쓰기 때문에 이제는 징이나 꽹과리 같은 농악기로 업종을 바꿨어요. 2000년도에는 힘든 일이 참 많았어요. 그 해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상을 치른 지 한 달 보름 만에 우리 가게 뒷집에서 불이 나서 장사 세간이 홀랑 다 타버렸어요. 불이 났을 때 허리를 다쳤던 것이 아직도 아파요.
위기를 벗어나면 또 다른 위기가 찾아오기도 했어요. 믿었던 사람에게 빚보증을 잘못 서줬다가 3000만 원이 넘는 돈을 사기를 당하고 나니까 하루하루 물건 밑천 댈 돈도 없더라고요. 스트레스가 극심해서 심장합병증까지 왔어요. 지금 생각하면 어찌 버텨냈는지 신기할 정도로 힘들었던 해죠. 버틸 때는 몰랐는데 그 거친 파도를 여러 번 견뎌내니 이제는 고객들이 서울에서, 멀리는 일본에서까지 찾아와요. 선물로 놋젓가락을 사가기 위해서죠. 그렇게 고비 속에서 자식들을 시집 장가보내고 나니 늘 불안하고 위태롭고 초조했던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지더라구요.

박병오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장사의 행복함을 느껴요. 손님들의 얼굴이 익숙해지면 형제가 오고 가는 것처럼 기쁘지요. 내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의를 다하고 싶어요. 가끔 시장에 오는 손님 중에는 ‘이거 얼마입니까’라고 묻지 않고 ‘이거 얼만데’라고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요.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곱다고 나도 ‘만원이다’라고 대답하고 싶지만 그럼에도 ‘만원입니다’하며 대답하는 것, 그런 거예요.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 그 당연한 예의를 잘 지키며 살고 싶다는 이야기에요. ‘안녕히 가세요’라며 인사를 하고 보내면 그 손님이 다음에 올 때는 주위 사람들을 하나둘 데려오거든요. 제 장사 밑천은 무엇보다도 ‘진심’이지요.

이제 돈 때문에 장사를 하던 시절은 지났어요. 농악기부터 그릇까지, 돈 안 되는 물품까지 모두 취급하는 그릇집은 이제 우리 가게밖에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계속해서 찾아와요. 사람들이 찾아오기 때문에 내가 여기에 있는 거죠. 물건을 사러 오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괜찮아요. 할머니가 찾아오면 병원 가는 길 건널목이 위험하니 모셔다 드리기도 하고요. 가게를 비우는 것이 불안하고 하나라도 더 팔지 못해 안달이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또 이제는 단골이 많으니 내가 잠깐 자리를 비워도 기다려줄 수 있을 만큼의 신뢰가 있기도 하고요.

글ㆍ사진 이동근 작가